책방산책

17_008. 어느날 중년이라는 청구서가 날아왔다.

so, what 2017. 8. 23. 20:56

고명한. 세이지. 2017.

요즘은 용인시의 혜택을 많이 받으며 책을 읽고 있다.

희망도서 바로대출제 덕분에 도서관에 입고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간을 비록 몇가지 제한은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게 빌려 읽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업계에는 도서관이 최대의 적 중 하나라지만 어쨌든 난 책을 사 준 거다. 소유자가 도서관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와 비교하여 중년에 관한 이야기는 현저히 적다. 아마도 다른 세대에 비해 중년은 스스로를 '이렇다'라고 정의내리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한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년의 삶은 늘 변수 투성이에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마다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하지만 눈앞에 놓인 여러 갈림길 중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시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매 순간 어떻게든 대처하며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경직되었던 사고는 유연해지고 마음을 흔드는 상황에서도 적어도 줏대는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간다.

... 중년의 자존감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림으로써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답이라 여겼던 것들에 물음표를 달아 고민하는 삶의 과정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아직도 나는 내 나이가 낯설다. 이 낯선 무대에서 적응하기 위해 때론 지름길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저 멀리 돌아가고, 때론 헤매고, 질척이는 진흙에 빠지기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답없을 것 같은 질문에 답을 달라고 아우성인 꽃띠 청춘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혹을 넘어 몇해를 더 지낸 것으로 보이는, 그래서 '어느날 중년이라는 청구서가 날아왔다'고 표현하는 작가가 하는 말이다. 10대, 20대가 들으면 뭐야 앞으로 20년, 30년을 더 살아도 선택의 기로에서 넘어지고 깨지며 살아야 한다는 거야? 할 수 있겠지만, 역시나 마흔을 넘긴 내 입장에서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공감 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물론 작가의 말처럼 그 선택에 대한 과정이나 결과에 대하여 가지는 긴장감은 많이 느슨해지고 여유로워 져서 덜 괴롭게 느껴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김형석 선생님의 책에선 인생의 황금기가 60세에서 75세라 했으니 어찌보면 이상 할 것 하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함은 비움보다 소유로 말하는 것.

... 요컨대 단순한 삶은 공간과 물건을 비우는 것보다 가치있는 것을 '소유'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둔다. ... 일부러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비움에 집착하여 꼭 필요한 물건마저 비우는 것은 오히려 비움을 과시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 타인에게 불필요해 보이는 물건일지라도 생활을 빛나게 해 주는 의미있는 물건이라면 소유함이 옳다. 결국 궁극적으로 단순한 삶이 추구하는 것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우선순위에는 '내'가 있어야 하며,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들만을 소중히 아끼며 갖고 살면 그것으로 족할 뿐, 물건의 개수나 빈 공간의 넓이는 크게 의미없는 부차적인 기준에 불과하다.  

 

미니멀리즘, 냉파, 욜로, 1코노미, 휘게라이프, 갭이어...

라이프스타일도 유행이라는 게 있어서 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인생이 잘못 되 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유행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그저 따라하는 삶을 산다면, 그야말로 껍데기 뿐인 남의 옷 걸친 것 같은 인생을 사는게 아닐까. 비움을 위한 비움을 우려하는 작가의 시각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결국 비우는 것의 의미는 내가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그렇게 내 앞에 놓여진 것들이 바로 나를 나타내는 것.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적어도 라이프스타일 만큼은 최신유행을 좇을 일이 아니라 제대로 마이웨이 해야 하지 않겠나...

 

삶에 있어서 의미있고 중요했던 순간들을 가장 선명하게 담고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체험하고 느꼈던 나,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공유했던 이들의 기억 속이다. 물건은 물건으로서 존재할 뿐, 우리의 추억을 대변해주지는 못한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어떤 것도 우리의 기억 외에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Nothing perfect lasts forever. Except in our memories)." ...참말로 맞는 말이다. 추억은 기억 속에서만 아름다운 그 모습 그대로 남는다.

 

아이의 재롱잔치나 어린이집 졸업식, 학교 발표회에 가보면서 느꼈던 점이 있다. 주로 남편이 동영상을 촬영하고 난 맨 눈으로 지켜보았었는데 남편이 함께 하지 못한 날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동영상을 찍었던 날이다.

아... 동영상 화면 속으로 내 아이 모습을 보는 것과 내 눈으로 직접 아이를 바라볼 때 내가 받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구나. 그 공간의 분위기와 소음, 공기, 아이의 움직임, 아이의 작은 표정 같은 것들이 화면으로는 잘 와닿지가 않았다. 그 동영상 하나 찍으려고, 다시 오지 않을 바로 그 순간의 아이 모습을 내 눈에, 내 기억에 담는 것을 놓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희미해 지기 마련이어서 잊고 싶지 않은 아이의 혀 짧은 소리나 통통하게 젖살 오른 뺨 같은 것들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순간의 아이의 표정, 그걸 보았던 내 감정은 오롯이 내 머릿 속에 그 느낌 그대로 새겨지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본 것의 100개 중 단 1개만이라 해도 말이다.

 

입을 옷을 넣어둘 옷장, 매 끼니 식사를 준비하고 차려먹을 수 있는 주방 가구와 식탁, 편안하게 눕고 앉을 수 있는 침대와 소파, 거기에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존재하기 위해 읽을 책을 꽂아 둘 책장과 공부할 책상 정도만 있다면 우리가 집안에 두어야 할 가구는 모두 갖춘 것이 아닐까. 그 외에 기념품을 전시하는 장식장이나 잡동사니를 수납하기 위한 이런저런 자잘한 수납장들은 '작은 잡동사니를 수납하기 위한 커다란 잡동사니'일 뿐이다. ... 갖추고 있는 기본 가구에 맞춰 수납할 물건 자체를 줄여보면 어떨까. ... 사람은 선반처럼 편평한 자리만 보이면 물건을 올려놓는 재미난 습성이 있다. 애초에 올려놓을 수 있는 가구, 수납할 수있는 선반을 두지 않는 것이 어지러이 물건을 늘어놓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두어 달 전에 '작은 잡동사니를 수납하기 위한 커다란 잡동사니'를 하나 샀다. 요즘 그걸 보고 있노라면 저기에 담긴 걸 그 때 그 때 처분하면 될 것을 저걸 왜 샀을까 하는 생각이 마침 들던 찰나였다. 너무나 절묘한 표현이라 덧붙일 말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집에 있는 물건 중의 절반은 버려도 될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는 '커다란 잡동사니'는 들여놓지 않으리라 다짐.